리버포드 농장과 필드키친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소탐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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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포드 농장과 필드키친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소탐구1>
리버포드농장 산책로에서

영국 데본지역을 여행하면서 ‘농장에서 식탁까지’ (Farm to Table)에 관심이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할 식당이 있다. 리버포드 농장(Riverford Farm)내에 위치한  리버포드 필드키친(the Riverford Field Kitchen)이다. 정해진 테이블 만큼의 예약을 받아 그 때 그 때 농장에서 수확한 재료로 코스요리를 선보이는 식당이다. 원한다면 식사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식당에서 빌려주는 착장을 하고 농장 전체를 산책하며 그날 식탁에 오를 재료들이 어디서 생산되는 지를 돌아볼 수 있다. 

농장을 둘러보던 중 농장의 중앙에 마치 구글이나 메타같은 IT기업의 창의적 환경과 유사해 보이는 쾌적한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 건물을 발견했다. 이 건물이 농장 구성원들의 휴게동이라는 점은 리버포드 농장의 보이는 경관이면에 대한 궁금증을 촉발했다. 이 후 이어진 필자의 필드 키친에서의 식경험은 ‘농장에서 식탁까지’가 가진 의미를 다른 수사가 필요없이 순수한 한끼의 식사만으로 오롯이 전해주는 근사한 것이었다. 농장을 물리적으로 돌아보는 것 이상으로 농장의 시간과 공간을 담은 식사를 마친 뒤에는, 리버포드 농장의 경관을 더 깊이 들여다 보게 되었다. 

가이 싱-왓슨(Guy Singh-Watson)이 설립한 리버포드 농장(Riverford Farm)은 단순한 유기농 농장을 넘어, 어떻게 음식이 생산되고 소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곳이다. ‘채소 상자(veg box)’로 영국 전역에 알려진 이곳은 농장에서의 생산과 ‘먹거리’의 소비를 흙에서 식탁까지의 과정으로 온전히 경험하게 함으로써, ‘먹는다’라는 행위, 매끼의 식사를 통해 농촌과 도시를 잇는다.

시작은 한 농부, 한 필지의 변화로부터

1987년, 가이 싱-왓슨(Guy Singh-Watson)은 영국 남서부 데번(Buckfastleigh)에 위치한 가족 소유 목초지 일부를 개간해 채소 경작지로 바꾸었다. 그의 이 결정은 단순히 재배 작물을 바꾸는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 농업은 산업화의 파고 속에서 기계화, 화학농법, 그리고 거대 유통망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다. 농부들은 점차 대규모 계약재배와 슈퍼마켓 공급망이라는 시스템에 묶여, 계절의 흐름이나 땅의 상태와는 무관하게 표준화된 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해야 하는 압박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기로 결심했다.

그의 실험은 불과 3에이커(약 1.2헥타르)의 땅에서 시작되었다. 화학비료와 살충제 대신 가축의 분뇨로 만든 퇴비와 거름을 사용하고, 한 가지 작물을 대량으로 심는 단작(單作) 대신 여러 작물을 돌려 심는 윤작(輪作)을 택했다. 효율성보다는 토양의 건강과 생태적 다양성을 우선하는, 시대의 흐름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초창기 그의 채소를 받아보는 소비자는 가족과 친구들을 포함한 30여 가구에 불과했다. 상자에 담겨 도시로 배달되는 채소는 계절과 날씨에 따라 매주 그 내용이 달라졌다. 소비자는 무엇을 받게 될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불확실성’은 단점이 아닌 매력으로 다가왔다. 소비자는 계절의 변화를 식탁 위에서 직접 마주하게 되었고, 이는 예측 가능한 공산품에 길들여진 도시의 삶에 신선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리버포드 농장은 단순한 생산지를 넘어, 생산의 주기와 리듬을 도시의 소비자에까지 전하는 파동의 근원지로 성장해 나갔다. 

농장의 확장: 순환을 위한 땅의 구조와 구성

리버포드 농장의 심장부는 워시 팜(Wash Farm)이다. 현재 농장의 전체 부지는 약 525헥타르(1,300에이커)라는 광활한 면적에 이르지만, 이 중 채소 재배에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땅은 매년 60헥타르(150에이커)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방대한 면적은 초지, 과수원, 야생화 밭, 습지, 그리고 임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토지 이용은 단순한 경관 유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토양의 회복과 생물 다양성 보존을 위한 순환적 운영 철학이 물리적으로 구현된 결과다. 경작지는 3~4년간의 재배 후 최소 2년간 휴식기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땅은 클로버나 호밀 같은 녹비 작물로 뒤덮여 지력을 회복하고, 다시 자연 서식지의 일부로 돌아간다.

워시 팜 외에도 노퍽(Norfolk)과 햄프셔(Hampshire)에 위치한 부속 농장들이 이 유기적 네트워크를 뒷받침하며, 데번, 서머셋, 콘월 지역의 소규모 유기농 농가 수확물이 리버포드의 채소 상자를 함께 채운다. 이 네트워크는 한 농장이 감당할 수 있는 생산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중앙집중적인 대규모 생산 방식이 아닌 여러 소규모 농가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분산형 구조로서 생산규모를 확보한다. 경작지 주변을 감싸고 있는 초지와 습지는 농업으로 인한 환경 부하를 줄이는 생태적 완충지대 역할을 하며, 임야와 야생화 밭은 꽃가루 매개 곤충과 새들을 불러들여 농업 생태계의 자연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소유 구조의 전환: 생산에 참여하는 농부 모두가 주인이 되는 농장

리버포드의 실험 중 가장 급진적인 것은 아마도 2018년에 단행된 소유 구조의 전환일 것이다. 창업자 가이 싱-왓슨은 외부 자본에 회사를 매각하라는 수많은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이 보유한 지분의 74%를 직원소유 신탁(Employee Ownership Trust, EOT)에 이전했다. 이는 시장 가격의 3분의 1에 불과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2023년, 그는 나머지 지분마저 신탁에 매각하여 리버포드는 100% 직원 소유 농장으로 완벽히 재탄생했다.

이로써 농장은 소수 자본가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업이 아니라, 약 1,000명에 달하는 생산 공동체가 주인이 되는 조직으로 거듭났다. 생산에 참여하는 농부들은 이제 ‘공동 소유주(Co-owners)’로 불리며, 매년 발생하는 순이익의 일부를 직급이나 급여와 상관없이 균등하게 배당받는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선출된 직원 대표들로 구성된 ‘공동 소유주 위원회(Co-Owner Council)’를 중심으로 민주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리버포드는 기업화되었지만 외부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단기적 성과와 끝없는 성장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이익은 무리한 확장을 위한 재투자보다는 농업의 지속성과 안정성, 그리고 생산공동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우선적으로 사용된다. 리버포드의 지분 구조는 단순히 소유권의 변동을 넘어, 농장이 지속가능성을 내재화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적 장치라는 점에서 탈성장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례다.

CSA 박스: 계절과 관계를 담은 꾸러미

리버포드의 정체성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시스템은 바로 지역사회 지원 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CSA)에 기반한 채소 상자다. 이 시스템의 성공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주당 배달되는 박스의 수는 2019년 약 50,000개에서 2024년에는 약 70,000개로 꾸준히 증가했으며, 연간 배송 건수는 약 320만 건에 달한다. 이를 통해 발생하는 매출은 약 1억 8백만 파운드(한화 약 1,900억 원), 순이익은 약 670만 파운드(한화 약 118억 원)에 이른다.

하지만 이 박스의 진정한 가치는 숫자에 있지 않다. 소비자는 박스에 담길 채소의 종류를 직접 선택할 수 없다. 다만, ‘채소 알림(Veg Alerts)’ 기능을 통해 정말 피하고 싶은 채소 세 가지를 미리 지정해 제외할 수는 있다. 이 작은 불편함은 소비자가 계절의 흐름에 자신을 맞추도록 유도한다. 박스 안에는 언제나 농장의 주간 뉴스레터가 동봉된다. 여기에는 이번 주 상자에 담긴 채소가 어느 밭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지난주와 날씨는 어떻게 달랐는지, 토양의 상태는 어떠했는지와 같은 농장의 소소한 일상과 함께, 제철 채소를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요리법이 담겨 있다. 박스를 열어보는 소비자는 단순히 규격화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농장의 한 주를 함께 살아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처럼 CSA 박스는 생산자의 시간과 소비자의 시간을 하나의 리듬으로 묶는 매개체이며, 농장은 이 박스를 통해 도시 소비자의 식탁 위에 잊혔던 계절과 자연의 속도를 다시 가져다 놓는다.

팜키친: 농장의 시간이 메뉴가 되는 식탁

워시 팜의 한가운데 자리한 팜키친(The Field Kitchen)은 리버포드의 철학을 가장 맛있고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일반적인 레스토랑과는 운영 방식부터 다르다. 팜키친은 하루에 런치와 디너, 단 두 번의 세션만 운영하며(토요일에는 브런치), 모든 손님은 그날의 단일 세트 메뉴를 나눈다.

이곳에는 정해진 메뉴가 없다. 그날의 메뉴는 아침에 수확된 작물에 따라 결정된다. 셰프는 식재료를 농장에 주문하지 않는다. 대신 농부가 밭에서 가져다주는 작물이 그날의 요리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브로콜리 수확이 적었던 날에는 작은 장식으로만 사용되고, 레스토랑 인근의 ‘필드 키친 가든’에서 자라는 28종의 토마토가 풍성하게 열린 날에는 토마토가 메인 요리의 중심으로 오르는 식이다. 

메뉴판에는 칼로리나 영양 정보 대신, 그 재료가 자라난 밭의 위치, 그날의 날씨, 토양의 상태 같은 정보가 기록될 때도 있다. 이곳에서의 식사는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넘어, 농장의 시간과 계절의 순환을 오감으로 맛보는 교육적 경험이 된다. 팜키친은 단순한 레스토랑이 아니라, 농장의 생산과 소비를 하나의 온전한 경험으로 엮어내는, 살아있는 체험적 공간이다.

소비자와의 연결: 느린 관계망 구축

리버포드의 소비자는 단순한 구매자가 아니라 생산의 리듬에 참여하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존중받는다. 채소 상자에 동봉되는 뉴스레터 외에도, 앱과 이메일을 통한 소통은 판매 촉진이 아닌 관계 형성에 초점을 맞춘다. ‘Veg Alerts’ 기능, 배송일 알림, 계절별 박스에 대한 상세한 안내는 소비자가 농장의 운영에 더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관계 맺음의 효과는 실제 데이터로 나타난다. 리버포드가 실시한 소비자 조사에 따르면, 고객의 90% 이상이 가공식품 섭취를 줄였고, 97%가 더 건강한 식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응답했다. 이는 리버포드가 단순한 식료품 공급자를 넘어, 사람들의 식생활과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시는 리버포드를 통해 농촌의 계절과 생명의 속도를 다시 체험하며, 농촌은 도시와의 안정적인 연결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지켜나갈 힘을 얻는다.

지속가능성을 향한 끊임없는 여정

리버포드의 실험은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들은 2025년까지 모든 배송 차량을 100% 전기차로 전환하고, 불필요한 플라스틱 포장을 완전히 퇴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한 토양 유실 방지, 습지 및 임야의 생태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농장 전체의 탄소 흡수 능력을 높이는 데 투자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리버포드가 B Corp 인증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배경이기도 하다.

리버포드 모델이 영국의 대규모 산업농업 전체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유한한 토지를 자원으로한 안전한 먹거리의 생산에 있어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와 신뢰를 바탕으로 ‘순환, 다양성’의 농촌과 도시가 연결된 지속가능한 경관이 펼쳐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 모델은 무한한 확장성보다는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속도 경쟁보다는 고유의 리듬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탈성장 시대를 맞아 모색되야할 전환의 방향에 대한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리버포드 농장과 팜키친은 토지의 구조, 생산 방식, 자원의 소유 구조, 그리고 소비자 관계까지, 모든 측면에서 CSA 를 통한 농지와 농장의 재생과 순환자원으로의 전환모델을 보여주고 지속적인 경관을 구축해내고 있는 보기 드문 사례다. 밭에서 시작된 한 농부의 작은 실험은 채소 상자를 거쳐 도시의 식탁으로 이어지며, 그 과정 속에서 도시와 농촌은 서로의 속도를 존중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이것은 대규모 산업농업의 대안으로서, 확장성보다는 안정성을, 속도보다는 토지의 재생을 지킬 수 있는 순환을, 이윤보다는 관계를 중심에 두는 새로운 농촌-도시연계 경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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