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과 재생의 공유지 실험: 샤펌 이스테이트(Sharpham Estate)
지난 기고에 소개했던 다팅턴 이스테이트(Dartington Estate) 방문 이후 자선신탁을 통해 대규모 사유지가 공적으로 전환되어 지속되고 있는 또 다른 사례가 있을까 수소문하여 방문했던 곳이 샤펌 이스테이트(Sharpham Estate)다. 영국 남부 데본(Devon)지역, 전환도시 토트네스(Totnes)에서 멀지 않은 애쉬프링튼(Ashprington)에 위치한 샤펌 이스테이트는 약 550에이커(약 223헥타르)에 이르는 부지로, 18세기 중반에 지어진 저택과 아름다운 풍경정원이 다트강(River Dart)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는 샤펌 트러스트(Sharpham Trust )가 샤펌 이스테이트를 지속가능하게 관리하면서 역사적인 건축물과 조경, 농장, 숲 등을 활용하여 자연과의 연결을 통한 마음챙김(mindfulness)을 수행하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샤펌 이스테이트는 원래 데번 지역의 귀족이었던 펠햄 가문(Pelham family)의 사유지였으며, 이후 여러 지주 가문을 거쳐 20세기 중반까지 사유지로 유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병원 및 군사 요양소로도 활용되었으며, 전후에는 한동안 방치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62년 모리스 애쉬(Maurice Ash)와 그의 아내 루스 애쉬(Ruth Ash)가 영지를 매입하면서 부지는 전환점을 맞는다. 농촌재생에 관심이 깊었던 애쉬부부가 20년간 치즈를 생산하는 농장과 와이너리로 재생했던 부지는 부부에 의해 1982년 자선신탁인 샤펌 트러스트로 전환된다.
아내 루스는 지난 기고에서 소개한 다팅턴 홀 트러스트(Dartington Hall Trust) 를 설립한 도로시와 레너드 엘름허스트 부부의 딸이었다. 남편 모리스 애쉬는 환경주의자, 도시계획가, 농부이자 레너드 엘름허스트에 이은 다팅턴 홀 트러스트의 수탁자(1964-1992)로 다년간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다팅턴 이스테이트에서 생태적 전환교육을 지향하는 슈마허컬리지(Schumacher College)를 공동설립하는 등의 혁신적인 실험을 이끄는 동시에 샤펌 이스테이트도 트러스트를 설립해 부지를 공적소유로 전환함으로써 생태공동체의 회복과 돌봄을 실천하는 장을 마련하여 미래 세대에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회적 유산으로 남기고자 했다.
아내 루스 애쉬는 트러스트 설립 2년 후인 1984년 사망했고, 모리스 애쉬는 2003년 세상을 뜰 때까지 샤펌 하우스(Sharpham House)에 거주하며 불교 수행 및 학습공동체를 만들어 참여했다.
사회적 자산이 된 샤펌 이스테이트(Sharpham Estate)
샤펌 이스테이트의 중심은 18세기에 지어진 Sharpham House다. Sharpham House는 조지안 시대에 유행했던 팔라디안 양식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는 저택으로, 외관과 내관 모두에서 고전주의적 질서와 장식적 절제가 돋보이는 영국 남부의 대표적 건축 유산이다. 1770년대 후반, 당시 저명했던 건축가 Sir Robert Taylor의 설계로 해군 장교 출신이자 정치가였던 Philemon Pownoll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영국 문화재청(English Heritage)에 의해 Grade I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정연한 질서 속에 중앙 홀의 타원형 계단의 과감한 공간이 잘 알려져있다. 명상과 피정프로그램이 운용되는 주요 공간 중 하나로 1층에는 명상실, 도서관, 식당, 공동 조리공간이 기능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2층 이상에는 참가자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
저택 주변으로는 공동텃밭이 조성된 월가든과 역시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다트강을 향해 펼쳐진 풍경정원이 조화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Dart 강을 향해 펼쳐지는 풍경정원(Landscape Garden)은 18세기 말의 전형적인 픽쳐레스크 양식으로, 영국 조경사에서 '영국의 풍경 정원을 창조한 사람'으로 불리는 Capability Brown의 설계 혹은 그의 영향을 받은 스타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형화된 프랑스식 정원에 반하여 자연과의 조화, 조망의 유려함, 구조의 비형식성의 추구는 그가 남긴 풍경적 미학의 전형을 보여준다. 고저차가 심하지 않은 지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살려 유려하게 조성된 이 정원은 산책로, 쉼터, 물길과 고목이 조화를 이루며, 명상과 사유를 위한 환경으로 활용된다.
550에이커의 부지는 Sharpham House 외에 Coach house, Barn retreat 등 역사적 건물이 위치한 건축용지가 분산되어 문화유산경관을 이룬다. 한편, 이들 건축용지 이외에도 농업유산경관이라 할 수 있는 포도밭, 방목초지, 농장과 수백년된 고목이 보존된 우드랜드, 강변의 습지와 초지 등 다양한 생태적 속성과 활용 목적을 가진 경관과 토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샤펌 트러스트는 장소의 생태다양성을 가꾸고 이를 기반으로한 수행, 교육, 훈련과 학습을 통해 마음챙김, 알아차림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주체다.
장소기반의 명상과 회복의 프로그램 구성
1982년 설립된 샤펌 트러스트의 목표는 ’공익을 위해 부지,건물, 자원 및 생물다양성을 유지, 보존 및 향상시키고, 활동, 성찰, 창의와 탐구를 통한 신체적, 지적, 정서적, 영적인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다.
샤펌 트러스트는 부지의 역사적인 건축과 다양한 자연환경-조경, 농장과 숲 등, 을 돌보는 동시에 고유한 장소에 기반해 현대인의 정서적 회복력을 기르고 트라우마와 슬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불교에서 영감을 받은 명상과 피정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다.
샤펌 이스테이트 곳곳의 문화유산 및 자연을 기반으로 샤펌 트러스트가 운영하는 다양한 명상과 회복 프로그램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Sharpham House-그룹단위로 3~5일 동안 진행되는 피정은 월가든(Wall garden)에서 유기농으로 수확한 재료로 음식을 준비하고 나누는 일상 속에서 전문 지도자와 함께 매일 아침 및 저녁의 정규 명상, 자연 속 걷기, 소그룹 대화, 요가 수련이 포함된다. 2.Coach House - 주로 가드닝, 나무심기 등 자연과 연계된 명상훈련을 진행한다. 3.The Barn Retreat Center : 1주 또는 2주 단위로 구성되며, 참가자는 공동체 생활 속에서 정원 가꾸기, 조리, 청소 등 일상 노동과 불교전통에 기반한 명상을 병행한다. 4.Hermitage Stay: 우드랜드 가장자리에 위치한 독거형 개인 명상 오두막에 기거하며, 일정 기간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며 자기 성찰에 집중할 수 있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5. Woodland Retreat: 텐트 또는 삼림 오두막에서 숙박하며, 자연과 밀착된 환경에서 명상과 생태활동을 병행한다. 조용한 식사, 자연소리 탐색, 야생식물 관찰 등이 프로그램에 포함된다.
버려진 녹지에서 생태다양성의 야생으로
이윤창출을 위한 자원으로 소비되고 성과가 측정되는 사적소유의 ‘장소’와 달리, 샤펌 이스테이트의 부지관리와 운용의 근간에는 장소와 장소기반의 활동을 하나의 호흡으로 보고, 인간과 환경이 공진화할 수 있는 과정을 내재화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한다.
사회적 자산으로서, 공유지로서 샤펌 이스테이트의 관리와 운용의 차별화는 2020년부터 2025년까지 ‘Wild for People’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진행한 50에이커 부지의 재야생화(rewilding) 프로젝트와 부지내 모든 생산농장용지에 대해 유기인증을 완료해(2022년) 순환유기농법을 토양관리의 원칙으로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또한 ‘Wild about tree project’ 는 몇천그루 규모의 재래수종의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로 지역사회 공동체, 피정참여자 등의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 중이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는 시민들은 생물다양성 모니터링, 삼림 내 자연 쉼터 조성, 곤충 및 새 둥지 만들기, 야생화 씨앗 뿌리기 등 환경 재생 활동의 주체가 되는 한편, 감각 기반의 자연 접촉 활동(눈 감고 나무 만지기, 소리 탐색, 향기 기록 등)을 통해 자연과 감각적으로 다시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된다. 특히 청소년, 치유 회복 중인 성인, 장애인 참여자를 위한 맞춤형 과정도 개설되어 있다.
협력적 운영
샤펌 트러스트는 다양한 파트너십과 소작임대, 외부로부터의 프로젝트 펀딩을 통해 샤펌 이스테이트의 생태적 가치를 높이고 사회적 가치까지 실현하는 협력적 운영 모델을 보여준다. 다음과 같은 외부 단체 및 지역사회 기반 조직들과 협력하여 이스테이트를 협력 운영한다:
- Ambios Ltd: 2012년 부터 샤펌 이스테이트에 입주하고 있다. 80에이커의 Lower Sharpham Barton Farm을 임대 농작하며, 생물다양성 보전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2020년 부터는 50에이커의 부지를 추가로 맡아 Rewilding 프로젝트를 협력하고 있다.
- David & Helen Camp: Home Farm과 Upper Sharpham Barton을 장기임대하여 유기농 방식으로 운영하며, 유기농산물 지역 공급망과 연계된 농업 실천을 지속한다.
- United Response: 장애인 및 정신건강 취약계층을 위한 사회적 농업 프로그램 운영, Ambios와 협력한다.
이러한 열린 협력 구조는 샤펌 이스테이트를 다양한 생태적 층위와 인간의 농업, 교육, 돌봄, 환경보전이 복합화된 복합생태경관으로서 지속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보전과 활용의 이분법 적인 경계을 넘어서 인간과 비인간 자연 사이의 새로운 관계 형성과 그 과정에서의 신탁의 목적인 ‘활동, 성찰, 창의와 탐구를 통한 신체적, 지적, 정서적, 영적인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이르고 이것이 참여시민 스스로를 포함한 환경의 회복과 재생으로 순환하는 과정, 이것이 곧 샤펌 이스테이트의 풍경으로 드러난다. 샤펌 이스테이트의 경관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얻어지기 보다는 공적으로 약속한 가치실험을 지속함으로써 얻어진다.